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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BOOK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저자 호사카 유지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교수가 역사 속의 선비와 사무라이를 조명한 최초의 책!
성리학이 낳은 두 개의 역사, 붓과 칼이 만든 가깝고도 먼 한일 비교사!
21세기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선비와 사무라이,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가?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렌즈 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심포지엄에서 한국인 교수를 가끔 만나곤 했는데, 그교수에 대해 "일본인 중에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인격자"라고 칭찬했다.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국인이 고매한 인격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스포츠계와 연예계에서 활약하는 재일 한국인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게 되면서 한일관계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의 정신세계를 동경하던 그는 2003년 한국에 체류한 지 15년 만에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현재 세종대학교 인문대학에서 교양학부 교수(일본학 전공)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일본 고지도에도 독도 없다』『일본역사를 움직인 여인들』『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마라』『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 등이 있으며 『독도·다케시마 한국의 논리』『한국전쟁』을 한국어로 옮겼다. 한일관계사, 독도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신사 문제, 한류, 일본의 우익사상 등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저술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한일을 대표하는 정신, 붓과 칼
선비란 무엇인가
선비가 선비를 말하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선비
속유와 진유
사무라이와 무사도
무사도에는 유학이 살아 있다
사무라이 정신
근대화 이후의 무사도

제2장 선비와 사무라이의 탄생
선비와 사무라이의 기원
최초의 무사
천황가와 사무라이
왕도 선비다
사무라이와 선비의 성
귀족과 사무라이
헤이시와 겐지의 차이
선비는 붓으로 싸운다
사무라이는 칼로 겨룬다
유교와 손자병법
사무라이의 고유신앙
선비와 사무라이의 교육
선비와 사무라이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

제3장 선비가 본 일본, 사무라이가 본 조선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아시카가 요시마사
이황과 성혼, 일본 학풍의 원류가 되다
손자병법의 명장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유학의 아버지, 조선 선비 강항
강항의 제자 후지와라 세이카
선비가 본 일본, 사무라이가 본 조선
도쿠가와와 미토학
김옥균과 민영익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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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1.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교수가 역사 속의 선비와 사무라이를 조명한 최초의 책!
한국의 정체성을 논할 때 우리는 쉽게 '선비'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 선비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존재이기에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독특한 이력을 가진 호사카 유지 교수가 조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그 방식에서도 '비교사'라는 흥미로운 방식을 취했다. 조선 선비의 맞수가 될 만한 일본 사무라이를 내세워 함께 비교함으로써 선비를 보다 더 명징하게 밝혀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유지는 한국인으로 귀화한 일본인이다. 이 사실을 먼저 짚는 것은 이 책의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진 사람으로 두 개의 조국을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특수한 위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인과의 역사 문제 때문에 일본을 보는 시각이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보통 한국인의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책을 집필할 정도로 유려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덕분에 보통 일본인의 한계 또한 넘었다. 애정을 갖되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은 역사와 문화를 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조건이다.

호사카 교수는 자신이 한국으로 귀화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제가 패망한 후 한국에 상당히 많은 양(20만 권 정도)의 책을 남기고 떠났는데 이 책을 연구하는 것이 전공이므로 그는 평생 이 작업을 하기 위해 한국에 남았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연구 활동을 하는 데 외국 국적이 많은 제약을 준 이유도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귀화하여 한반도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한일관계에서 무척 민감한 독도문제, 야스쿠니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한류, 일본 우익사상과 관련된 역사적 문제를 연구하고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한 그는 엄밀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 한 예로 독도문제에서도 정확한 문헌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여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해 보인 바 있다.

2. 성리학이 낳은 두 개의 역사, 붓과 칼이 만든 가깝고도 먼 한일 비교사!
'사士' 자는 조선에서는 선비를,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판이하게 다른 역사적 위상과 역할을 가진 이 두 엘리트가 같은 한자로 표현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선비와 사무라이는 그 정신적 뿌리를 중국 성리학에 두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전형적으로 문화가 전파되는 흐름을 생각하면 사무라이가 선비로부터 그 정신을 상당 부분 가져왔을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저자는 구체적인 역사 사례를 통해 독자가 이를 납득할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이끈다. 한국사와 일본사에 두루 정통한 저자는 선비와 사무라이의 기원과 형성, 독특한 역사적 전개, 눈에 띄는 대표적인 인물들의 활약상을 비교함으로써 한일관계를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들여다본다.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의도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를 비교하고 재조명함으로써 한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흔히 한국과 일본 사이를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이는 그간의 굴곡 많았던 역사를 보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실제로 우리가 글로벌화돼가는 세계에서 일본과는 서로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사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은 양국 모두에 깊은 애정을 가진 저자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솔직담백한 편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21세기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대표 상징을 통해 한일의 역사와 문화를 읽는다!
양국의 정치와 문화를 이끈 대표적인 지배계층이었던 선비와 사무라이는 문文과 무武, 정靜과 동動, 효孝와 충忠으로 대비되기도 한다. 양국 정치가와 경제계 인사들은 수시로 그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각각 선비와 사무라이를 꼽는다. 현재에도 사람들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선비와 사무라이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정신은 한일 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이 원하는 고결한 도덕성과 사유의 체계를 갖춘 이상적인 인간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는 이들 정신이 양국민의 핏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표정 있는 역사’의 일곱 번째 책인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는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선비와 사무라이의 개념을 제대로 바로잡으면서 흥미로운 사례와 인물들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으므로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독자는 선비와 사무라이라는 두 상징적 존재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단숨에 꿰는 통쾌함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4. 선비와 사무라이,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가?
- 선비 vs. 사무라이 철저 비교분석!

1) 400년 전 일본 도쿄에도 한류의 열풍이 휘몰아쳤다!
조선통신사가 일으킨 유학 열풍은 거의 현재의 한국 대중문화가 일으키고 있는 한류에 비견할 만하다. 조선통신사가 행렬할 때면 일본 백성들은 시를 지어 보여주기도 하고, 글을 적어달라고 요청하는 등 뜨거운 환영 인파가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근대화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을 통해 전래된 유학의 정신은 천황을 중심으로 새롭게 개편된 일본의 가부장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아시아 침략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조선 선비에게 한수 배웠다!
일본 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선비는 이황과 성혼, 그리고 성혼계의 학자인 강항이었다.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유교를 가르쳤는데 이 세이카는 훗날 일본 유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로부터 유학을 배우고 통치에 활용하였다.

3) 사무라이는 선비와 통한다!
붓과 칼로 극명하게 갈리는 듯했던 선비와 사무라이의 간격이 사실은 그렇게 멀지 않았음을 저자는 니토베 이나조의 저작인 <무사도>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다. 주군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부모에 효도를 다해야 한다,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아랫사람에게 인자하게 대해야 한다,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한다, 부정부패를 증오하고 공정성을 존경해야 한다, 부귀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주어에 ‘선비’를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덕목들은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에서 설명한 사무라이의 도리다. 언뜻 생각하기에 엄청나게 이질적인 이 두 부류가 서로 닮게 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납치된 유학자 강항은 주자학의 이념을 일본 상류사회에 전달하는 사자가 되었고, 계약관계와 비슷하던 사무라이와 주군의 관계는 선비와 왕의 관계에 가까워졌다. 충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층에 자연스럽게 파고 든 것이다.

4) 명분과 이념을 내세운 선비와 무력을 중시한 사무라이!
정쟁과 전쟁의 차이, 이것이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의 또 하나의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성리학에 접근하는 이념, 즉 이기설은 선비로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였고, 이것이 결국 학파에서 정파로 발전되었다.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등의 당파는 그 근원을 학문 연구의 방향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철저히 군사력에 의한 실력차이에 의해 정치세력의 승패가 갈렸으며, 1868년 천황에게 모든 권위를 돌려준 메이지유신이 올 때까지 일본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은 물리적인 힘의 논리였다. 유교보다 100년 앞서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손자병법은 일본 무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경전이 되었고, 일본의 전국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다케다 신겐은 손자병법을 자신의 승리를 위해 철저히 신봉하고 따랐다.

5) 선비는 주자의 성리학을 조선의 것으로 심화발전시켰으나, 사무라이는 손자병법을 주로 삼고 성리학은 보조적으로 활용했다.
조선 선비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성리학을 보다 심화발전시켰고 나중에는 이것이 도가 지나쳐서 교조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항상 전쟁으로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오래전에 전래된 손자병법을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사상으로 삼고 성리학을 추가로 받아들여 이를 통치에 활용했다.

6) 선비는 중앙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나 사무라이의 목표는 영지를 얻어 성주가 되는 것이었다.
선비는 수기치인의 훈련을 거쳐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조정에서 벼슬을 받아 사대부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이에 반하여 사무라이의 최종 목표는 영지를 얻어 성을 쌓고 일국일성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야 했다. 주군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으면 영지를 하사받게 되었던 것이다.

7) 선비는 학문과 예술을 동시에 배웠으나 사무라이는 무예 연마가 필수고 부가적으로 기본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조선의 선비는 학자인 동시에 예술적인 소양을 갖춘 풍류인이기를 요구받은 반면, 일본의 사무라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 그 다음이 학문이었다. 그 원인은 두 나라의 근본적인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은 조선 땅에 주자학의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외부에서 이물질만 들어오지 않으면 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외부에서 이적이 침입하지 않도록 철저히 문을 잠그고 침략자들을 막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항상 적을 상정하여 적을 이기기 위해 내부적 결속을 다져가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8) 선비는 왕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충언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으나, 사무라이가 주군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할복하여 건의서를 올릴 만큼 용기가 필요했다.
조선의 왕과 선비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선비가 관직을 가지면 왕을 보좌하게 되지만 왕이 잘못했다고 판단되면 충언하는 것이 선비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에도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장군이나 주군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충고하려면 할복하여 건의서를 올릴 만큼 용기가 필요했다. 그만큼 사무라이는 장군이나 주군의 명을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으므로 자유롭게 진언할 권리는 일부 측근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기도 했다.

9) 선비는 유교가 곧 신앙이었으나, 사무라이는 일본에 자생하는 고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선비는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할 정도였기 때문에 유교가 곧 선비의 신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신도, 불교, 유교가 혼합된 자생적이고 독특한 고유신앙을 섬겼다.그중에서도 하치만대보살을 사무라이의 전쟁 신으로 모셨다. 하치만대보살은 불교 이름을 가진 최초의 일본신이기도 하다.

본문 중에서

"일본의 에도 막부는 무인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70년간이나 대내외적으로 평화시대를 이루었다. 사무라이가 정권을 잡은 이래 에도시대만큼 평화로운 시대는 없었다. 그 이유가 에도 막부의 탁월한 통치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지만 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당한 조선 유학자의 공로가 컸다고 생각한다.
에도 막부는 조선 유학자에게 성리학을 배운 인사들을 막부의 사상교육 책임자로 삼았다. 에도 막부가 성리학을 막부의 정통사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같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과 일본은 교린관계를 맺고 긴 평화시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